멘탈 성장의 단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손자병법의 이 유명한 구절은 멘탈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멘탈의 성장을 원한다면 무엇보다 멘탈의 실체를 정확하게 아는 게 승전의 선결과제이다.


동양은 멘탈의 실체 막연하게 규정

하지만 직관을 중시했던 동양에선 멘탈의 실체를 너무 막연하게만 규정했다. '나'라는 개념, '마음'이라는 개념 등이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법무아, 즉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는 불가의 법어도 '나'라는 컨셉을 중심으로 설명한 것이다. 심외무법, 즉 '마음 밖에 달리 법이 없다'는 설법도 일반인들이 멘탈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는 막연하기만 하다. 이 뭣고? 이렇게 막막한 화두 하나만을 잡고 궁리를 거듭하는 것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마음이 있는 것은 분명하게 알겠지만 그게 도대체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역할과 기능, 한계가 무엇인지 여부가 애매하기만 하다.


   켄 윌버의 멘탈 정리


이런 답답함에 길을 열어준 건 서양에서 영성계의 아인슈타인으로 불리는 켄 윌버다. 그는 멘탈의 영역을 다섯 가지로 나누어 그것이 생성된 이유와 존재 형태, 그것을 넘어서는 방법 등을 논리정연하게 제시했다. 

그는 날마다 규칙적으로, 또 일정 기간 집중적으로 동양적인 수련에 매진하면서도 서양적인 추론을 병행해 마침내 의식의 스펙트럼을 만드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가 만든 의식의 스펙트럼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멘탈의 상승을 시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더없이 든든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1. 합일의식 수준에서 사람은 유기체 차원을 넘어 우주 그 자체와 하나라고 느낀다.

 2. 다음 수준에서 사람은 우주 전체와 일체가 아니라 하나의 유기체일 뿐이라고 여긴다. 정체감이 우주 전체에서 하나의 유기체로 좁혀진다.

 3. 그 다음 수준에서 사람은 유기체의 일부인 마음(에고, 자아)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4. 마지막 수준에서 사람은 마음의 측면에서 원치않는 그림자는 억압하면서 '페르소나'하고만 자신을 동일시한다.

 5. 1과 2사이에 초개아 대역이 있다.

이들 5개 대역 가운데 나는 지금 어떤 스펙트럼에 놓여 있을까? 그것을 확인하면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나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또 그에 대한 치유나 성장을 위한 방법론 선택도 선명하게 판단이 선다. 


   일반인들의 멘탈 수준


세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4대역, 즉 페르소나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상의 속성이 사람을 그렇게 몰아간다. 그것은 에고보다 더 낮은 단계로 허약해진 자기상이다. 

적어도 에고는 비록 몸을 하위개념으로 낮추긴 하지만 마음의 모든 측면을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페르소나 수준에선 마음 가운데 보기싫은 일부를 다시 자신의 정체성 밖으로 밀어내 버린다. 그래서 정체성의 범주가 가장 좁아지게 된다. 

켄 윌버는 페르소나가 분노, 자기주장, 성적 충동, 환희, 적대감, 공격성, 충동, 흥미 등과 같은 자신의 특정한 성향을 스스로 부정할 때 만들어진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부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없어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면 사람들은 다시 '투사'라는 기제를 이용해 그것을 남에게 뒤집어 쉬운다. 미움이 용쏟음치고 분노가 펄펄 끓어오르는 건 내가 그러는 것이지만 애써 그걸 부정한다. 그걸 인정하면 내 위상에 흠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원인제공자로 몰아붙이고 그 사람의 하는 짓이 밉고, 바로 그것 때문에 내 분노가 폭발했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이렇게 괜찮은 사람인 내가 오죽하면 미워하고 오죽하면 화를 내겠냐고? 저 인간이 정말 저질이고 나쁘니까 그렇지. 그러니 저런 사람을 응징하는 건 내 품위를 회복함과 동시에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야! 한 사람의 내면은 물론 세상에서의 갈등과 분열, 대립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마녀사냥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이런 페르소나 상태에서는 자아를 에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게 급선무이다. 이건 정신과에서 주로 실시하는 치유법이다. 그러나 페르소나를 넘어 에고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에고 역시 문제 투성이일 뿐이다. 그러면 여기서는 무아, 즉 자아를 넘어서는 것이 핵심적인 방법이 된다. 영성이나 마음공부의 영역에서 중시하는 방법이다. 

그러니 한쪽에선 자아를 살리라고 말하고 다른 쪽에선 자아를  죽이라고 강조해도 둘 다 맞는 말이다. 다만 그 사람의 현재 수준을 가늠해 적용 방법을 선정하는 과제만 남아있을 뿐이다. 


   멘탈 영역의 지피지기


이렇게 의식의 수준이 구분되는 건 다 경계 때문이다. 그렇다면 외부에 투사했던 내 것을 다시 내 것으로 인정하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하나의 경계가 해체되면서 이전의 적과 친구가 된다. 나 아닌 것은 점점 더 작아지고 나는 점점 더 커지는 것이다. 성장이란 기본적으로 밖을 향한 조망과 안을 향한 깊이라는 양편 모두에서 경계의 성장을 의미한다는 게 켄 윌버의 설명이다.

"모든 경계와 마찬가지로 최초의 근원적 경계는 다만 하나의 환상일 뿐이다. 단지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될 뿐이다. 우리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모든 측면에서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그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 최초의 경계를 찾아 나선다고 해도 당신은 그 흔적조차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유령은 그림자를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결론적으로 경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리한다. 경계는 하나의 환상일 뿐이며 환상을 뿌리째 뽑아 근절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그것이 환상이라는 걸 이해하고 꿰뚤어보는 것이다. 그러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해소가 된다. 문제 자체가 원래 없게되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간과한 채 최초의 경계를 찾아내 그것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엄청난 오류이거나 적어도 어마어마한 시간낭비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슬프지만 나도 그기에 해당이 된다. 경계가 환상이란 점을 분명하게 인지하지 못했기에 내면을 순례하는 여정이 17년이나 걸렸다. 시간은 물론 에너지와 돈의 낭비가 너무 많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속은 것이었다.

그러니 멘탈의 영역에서도 지피지기가 얼마나 중요한가? 적의 실체를 알지 못하면 허깨비를 제압하겠다며 초인적인 노력을 경주하다가 결국엔 허사로 끝나는 허망한 연극에 휘말리게 된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는 무서운 함정이다.

#동양멘탈 #서양멘탈 #멘탈지피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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