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의 대상은 가짜 나

버림의 영역에선 가장 먼저 버려야하는 게 에고이다. 모든 가짐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모든 번뇌와 괴로움, 고통의 뿌리가 바로 에고이다. 구체적인 방법론은 이미 많이 나와있다. 그 중에서도 단기간에 가장 확실하게 버리는 방법은 '상상으로 죽고 버리기'이다.



   상상으로 죽고 버리기


찬기운이 스며드는 10월 하순 어느 날, 나는 가야산의 어떤 선방을 찾았다. 선방의 기운은 과연 달랐다. 날마다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뒤척였던 내가 입소 첫날부터 곤하게 잠들 수 있었다. 버림의 에너지가 강한 곳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하루 밤의 단잠으로 기운을 차리고 수련과정에 들어갔다. '죽고 버리기'는 한마디로 화끈했다. 그 방법이 처절해 내심 죽고 싶었던 내겐 아주 딱이었다. 나는 상상으로 원없이 죽고 또 죽었다.

젊은 날 몇년 동안 검도를 수련했기에 나는 할복을 죽음의 방법으로 선택했다. 상상으로 하는 거니까 실제론 안죽는다는 일종의 안도감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반가부좌로 앉은 자세에서 두 손으로 단도를 움켜잡고 배꼽 아래 세치 왼쪽 복부를 힘껏 찔렀다. 비록 칼은 없었지만 실제로 할복을 하는 것처럼 온힘을 다해 단도를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죽 그어나갔다. 다시 오른쪽 복부에서 명치쪽으로 칼날을 이동했다. 마지막으로 명치에서 단도를 뽑아 왼쪽 목에 칼날을 겨눈 뒤 두 손으로 사정없이 베어버렸다.

   "우웩-"

상상으로 감행한 자결인데도 구토가 왈칵 올라왔다. 토사물이 상의를 적셨다. 하지만 죽는 넘이  그게 무슨 상관인가. 쓰러진 내 시신 위에 휘발유를 콸콸 부었다. 그리고 불을 켠 라이터를 그 위에 던져버렸다. 불길은 맹렬한 기세로 내 시신을 태워나갔다.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 같았다. 화장이 끝난 뒤엔 다시  그 잔해 위에 폭약을 대량으로 장착해 폭파해버렸다. 내 몸은 흔적없이 사라졌다. 이 지상엔 내 몸의 세포 하나 남지 않았다.

그렇게 육신을 떠난 내 영혼은 태초의 블랙홀 앞까지 바로 올라갔다. 그리고 살아온 날의 기억을 시간 순서대로 떠올려 그 영상들을 블랙홀 속에 던져버렸다. 유아시절, 학창시절, 직장시절.. 살아온 날들의 기억이 차례대로 블랙홀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모든 기억들의 영상을 버린 뒤 마지막으로 내 영혼마저 그 블랙홀 속으로 던져버렸다. 몸도, 마음도, 영혼도 모두가 그렇게 없어졌다. 나는 제로가 되었다. 존재하는 것이 하나도 남지않은 절대공의 상태가 되었다.


   목숨에 대한 집착

   
이렇게 한바퀴를 돌리는데 최소한 4-5시간이 걸린다. 그럼 한바퀴만 돌리면 목숨에 대한 집착이 끊어지는가? 목숨에 대한 집착, 그 본능적인 욕망은 결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번만 해도 얻는 건 분명히 있었다. '죽고 버리기'를 하면 기억의 뿌리가 얼마나 대단한지, 또 기억과 함께 우리가 잊은 줄 알았던 감정들이 얼마나 굳건하게 또아리를 틀고 버티고 있는지를 분명히 자각하게 되었다.
 
KBS가 방영했던 다큐멘트리 '마음'은 평범한 아가씨의 일상적인 사례를 통해 감정의 허구성을 실감나게 설명했다. 

늦은 밤 으슥한 골목길을 혼자 걸어가던 아가씨. 뒤에서 자기를 따라오는 남자의 구둣발 소리가 들리자 갑자기 불안에 사로잡힌다. 혹시 치한? 혹시 내게 성폭행을..? 이렇게 불길한 예감이 드는 순간, 아가씨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한다.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고 식은 땀이 흐른다. 공포심에 짓눌려 필사적으로 달아나기 시작한다. 그러자 상대남자의 발걸음도 덩달아 빨라진다. 남자는 아가씨가 으슥한 골목길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우악스런 손길로 아가씨의 어깨를 확 낚아챈다.
   
     "아악-"

질겁한 아가씨는 비명을 지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위기일발, 긴박한 순간. 그러나 그 다음에 더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오빠? 아이, 놀랬잖아!"

아가씨는 생긋 웃으며 오빠에게 팔짱을 낀다. 공포나 불안은 삽시간에 사라졌다. 둘은 팔짱을 낀 채 정겹게 걸어간다.


   스스로 만든 환상

  
마음은 이렇게 스스로 환상을 만들고, 스스로 그 환상에 구속이 된다. 마음은 이 몸이 나라고 생각한다. 몸에서 쏟구치는 감정들이 내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이 마음이 내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어렴풋하게나마 영혼이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또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진 그 무엇이 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몸이 죽어 없어지고, 마음이 없어지고, 영혼마저 블랙홀 속으로 사라지면 나는 어떻게 될까?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져도 그 사라짐 자체를 알고있는 이 의식은 또 무엇일까?

멘토는 이 모든 게 가짜라고 말했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건 '가짜 나'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인지를. 죽고 버리기를 하면서 한바퀴를 돌리고 잠시 동안 명상을 하는 작업을 계속했지만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들, 즉 내 몸과 마음과 감정들에 대해 왠지 석연치 않은 느낌은 들기 시작했다.

#상상으로죽고버리기 #환상 #집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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