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양면성
"산이란 산은 새 한마리 날지 않고
길이란 길은 인적이 다 끊겼다.
외로운 배 위에 삿갓 쓴 늙은이
혼자서 낚시질 강에는 눈만 내리고"
(천산조비절 만경인종멸
고주사립옹 독조한강설)
당나라의 유종원이 권부에서 밀려나 오지로 좌천된 심정을 표현한 시, <강설>이다. 사면초가에 직면한 한 남자의 좌절감이 절절이 배여있다.
추락에 예외없다
사노라면 이런 추락은 시기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찾아온다. 계절이 4계로 순환하듯이 인생도 흥망성쇠로 리듬을 타는 것이다. 그런 고난을 피하고 싶은 건 인지상정, 그러나 켄 윌버는 <무경계>에서 '고통은 거짓 경계를 알아차리는 최초의 움직임'이라며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평가한다. 고통을 너무 미화해서는 안되지만 지나치게 폄하해서도 안된다는 입장이다.
"삶의 괴로움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은 동시에 보다 심층적이고 진정한 실재로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고통은 현실의 소위 표준적인 자기 만족에 대한 기대를 산산조각내며, 우리로 하여금 지금까지 회피해왔던 방식과는 다르게 자신의 세계를 세심하게 보고 깊이 느끼고 접하게 함으로써, 특별한 의미에서 살아있게끔 강요하기 때문이다.
고통이야말로 '최초의 은총'이란 말이 전해오는데, 나는 이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특수한 의미에서 고통은 거의 환희의 순간이기도 하다. 고통은 창조적인 통찰력이 탄생하는 기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통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다면 환희는 고사하고 인생이 무너지는 시그널이 될 개연성이 훨씬 더 높다. 겉보기엔 남부럽지 않게 잘살 것 같았던 선남선녀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례가 어디 한둘인가 말이다. 숱하게 많은 영혼들이 이 고비를 넘지 못해 황폐하게 몰락하거나 심할 경우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
켄 윌버도 이런 점에 대해선 깊이 우려하면서 진심으로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영혼의사'가 없는 점을 개탄했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판단하면 멘탈 교정의 가장 우선적인 목적은 자신의 진정한 가치와 삶의 의미를 자각하는 데 있다.
멘토마다 처방이 다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마음의 영역에선 멘토마다 서로 모순되는 진단과 처방을 내리면서도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정작 고통받는 개인들은 치유나 성장의 도움은 고사하고 방법론의 선택에서부터 혼란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또 궁지에 몰려 찾아온 개인들에게 교정이나 시술을 통해 일정한 도움을 준 뒤에는 그것을 미끼로 상대를 노예로 만들어 심신을 착취하는 악행들도 분명히 있다.
돈을 자발적으로 바치게 하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몸도 바치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영혼까지 헌납하도록 강요하는 가짜 구루들, 바로 그런 존재들 때문에 "도판이 개판이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기에 접어든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가이드나 멘토를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선택해야만 한다.
"과거에 내가 길을 잃었다고 느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답을 찾으러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책을 찾았고 선생과 구루를 찾았다. 그들이 영원한 미제의 해결책을 들려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뭘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더 알 수 없었다. 내 자신의 힘을 자꾸만 바깥의 누군가에게 줘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타 무르자니가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에서 고백한 저런 에러는 모두가 타신지석으로 경청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궁극적으로 내 답은 내 안에 있고
당신의 답은 당신 안에 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순례
브라질의 작가 코엘료의 인생 1막은 대략 난감이었다. 10대 시절부터 부모와의 갈등이 심해 반강제적으로 정신과 치료를 세번이나 받았고 히피에 빠졌는가 하면 밀교 세계도 들락거렸다. 잡지사 기자 노릇도 신통치 않았고, 작사작곡으로 돈을 좀 만진 뒤에도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 채 방황만 거듭했다. 그러나 마음공부의 스승을 만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이후에 그의 2막은 확연하게 달라졌다.
"나는 스스로를 배신한 유다였다!"
산티아고 순례길 막바지에 그는 자신의 잘못을 절절히 참회하며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 앞에서 뜨겁게 오열한다. 그리고 죽음이 찾아온 그 순간에 결코 후회만은 안고 가지 않겠다고 결연히 맹세한다.
그날 이후 그는 작가의 길로 과감하게 뛰어든다. 되고픈 욕망은 있었지만 왠지 유치해 보이고 자신감도 없어 늘 멈칫거리기만 했던 그 길로. 그리고 '순례자', '연금술사'같은 대작을 잇따라 터뜨렸다.
오늘날 그는 내면을 탐구하고 삶의 본질을 일깨우는 작가로 전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또 그의 재산도 재벌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팽창했다. 1막이 엉망이었다고 해서 코엘료가 이룬 2막의 저 눈부신 성취를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피에트로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코엘료가 발표했던 소설의 제목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이 소설의 제목처럼 삶의 무게에 짓눌려 고통스럽게 울고 있다. 나 또한 일상의 강변에서 아프게 울었다. 힘들고 외롭고 두려워서 울었다.
그렇지만 가엾은 영혼아, 아무리 힘들고 외롭고 두려워도 스스로를 배신하면 안된다. 오늘 잘 나가는 사람들, 울고 있는 그들을 비웃지 마라. 코엘료보다 더 빛나는 성취가 그들 속에서 나올 수도 있을테니까.
#고난의양면성 #산티아고순례 #스스로를배신한유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