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는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에고와의 대결은 대개 결투처럼 시작된다. 에고를 극기의 대상으로 보고 저마다의 방법을 동원해 에고를 넘어서거나 제거하는 것이 주요한 과제가 된다.
수련은 하나의 방편
개인적으로 수련 초창기에 접했던 '죽고 버리기'는 에고를 강력하게 제거하는 방식이었다. 나라는 존재를 마귀로 규정하면서 하나도 남김없이 처절하게 죽이고 버리는 과정이었다. 그런만큼 수련의 효과도 강력했다. 6개월 안에 각성의 경험을 여러차례 하면서 몸은 물론 성격까지도 많이 변했다.
그러나 의식을 동원해 그렇게 죽고 버린다 해도 에고가 어디 가겠는가. 진정한 내가 우주 내지는 합일의식이라면 버린 것 마저도 궁극적으로는 내 안에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강도높은 수련은 결국 멘탈의 단계적인 상승을 유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을 뿐 에고를 제압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아니타 무르자니:
"당신이 에고를 부정한다면 에고는 당신을 향해 더욱 거세게 돌진해 올 테니까요. 무엇인가를 거부하면 할수록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 더욱 끈질기게 대듭니다. 하지만 당신의 에고를 전적으로 아무런 조건없이 사랑해 주고, 그것을 이 삶에서 당신이 표현되는 한 모습이라고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더 이상 에고로 인해 골치 아파할 일이 없을 겁니다. 에고는 당신의 성장을 가로막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장의 발판이 되지요."
그녀는 에고가 영적 성장을 방해한다, 그래서 떨쳐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왜 그랬을까. 그녀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아니타 무르자니:
"우리는 모두 에고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에고는 여기에 있는 우리의 자연스런 일부분이에요. 살면서 에고에 저항해 싸운다면 이는 더 많은 자기 판단을 만들어낼 뿐이에요. 자신의 에고를 조건없이 사랑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다른 이들의 에고도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러면 에고라는 게 더 이상 문제되지 않습니다."
에고에서 벗어나는 길
이번엔 국내 고수의 입장을 들어보자. 노자 도덕경의 달인이자 멘탈의 영역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다.
김기태: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그 나라는 에고로부터 자유할 수 있을까? 다른 길이 없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이 아닌 남이 되려는 모든 욕망과 노력을 포기하고,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한 그리고 깨달음이라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모든 실친과 수행을 버려보라.
그리곤 가만히 있어 보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살아보라는 말이다.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터이니, 그렇게 조금만 기다리라. 그러면 스스로 알게 되리라, 모든 것을."
이렇게 역설적인 에고 제거법은 김기태 선생이 <아, 여기>에서 제시한 것이다. 강압적인 제압 대신 에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결과적으로 에고를 사라지게 한다는 것이다. '빅 마인드'를 창안한 겐포 머젤 선사의 입장도 이와 비슷하다.
겐포 머젤:
"빅 마인드 과정은 에고와 싸우지 않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나의 접근법은 싸움을 피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기본적으로 에고를 우리 편으로 만들어 에고로 하여금 그 싸움에서 우리를 돕게 만드는 것이다. 그건 적에게 다가가서 '당신을 무찌르도록 날 도와주시겠습니까?'라고 묻는 것과도 같다..
나는 에고를 초대하여 에고 자신을 무찌르는 나의 일을 에고가 돕게 만든다. 에고에게 할 일을 주는 것으로 그렇게 만들 수가 있다. 그리고 에고는 할 일을 얻으면 꽤나 만족해서 나를 돕는 것 같다. 그 점이 놀라운 점이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알면서도 에고는 실제로 나를 돕는다."
작위적인 노력 배제
이런 기법들의 특징은 작위적인 노력을 철저히 배제한다는 점이다. 김기태 선생의 방법은 당면한 감정을 그냥 있는 그대로 감수하는 것이다. 겐포 머젤의 방법은 필요한 관점의 목소리를 불러내 바로 그 상태로 이동해 버리는 것이다. 에고에게는 다른 차원의 목소리가 끼어들지 못하게 통제자의 역할을 부탁한다.
예컨데 초월적 자아의 수준이 궁금하면 자신의 내면에 대해 "초월적 자아와 대화하도록 허용해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질문하고 자신이 즉시 초월적 자아의 목소리가 되어 내면에서 나오는 소리를 말하는 것이다. 초월적 자아는 에고가 사라진 상태이지만 에고는 그 목소리에 다른 잡음이 끼어들지 못하게 열심히 통제자 노릇을 한다. 에고 자신을 죽이는 일에 기꺼이 협조하는 야릇한 시추에이션이다.
가을이 되면 외로움이 두려운 남자들은 부지런히 친구를 만나 술잔을 기울이고 주말이면 산행이나 모임에 빠져든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건 에고와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에고를 외면하는 것이다. 외로움을 잠시 잊을 수는 있겠지만 그 자체를 사라지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외로움의 심연 속에 푹 빠져들면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외로움이 몰아치는 그 순간은 분명 더 힘들지만 그 동력이 다 떨어지면 내면에서 기쁨의 에너지가 쏟아오르게 된다.
목소리와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외로움의 목소리를 불러내 그 설명을 들은 뒤 계속해서 두려움, 기쁨, 자아, 초월적 자아 등의 목소리를 들으면 외로움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게 된다. 나를 보는 시각이 외로움 하나가 아니라 수십 가지로 이동하면 에고는 절로 약해지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다.
김기태 선생은 <아, 여기>에서 그렇게 자아가 사라진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조금은 감성적인 톤으로 들려준다. 그 설명을 들으면 에고를 제압하는 게 왜 필요한지 절로 이해가 된다.
김기태:
"그러고 나니 짜증이 곧 도, 분노가 곧 진리였으며 게으름이 곧 보리였다. 탐진치가 그대로 여여함이었으며 미칠 것 같던 번뇌망상이 그대로 부처였다. 아, 우리네 삶, 우리네 일상,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나의 안과 밖 그 어디, 그 어느 한 순간도 도 아님이 없었다.
그러니 도란 얼마나 구체적인가? 우리가 지금 현재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때로 짜증내고, 때로 분노하며, 때로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오욕과 칠정 속에서 울고 웃으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 모두가 다 도요, 어느 하나 진리 아님이 없으며, 이 모습 이대로가 부처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미 깨달아 있다."
에고의 부정적 표상으로 알려진 짜증, 분노, 번뇌망상이 모두 완벽하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리다고 분별하는 에고와는 판이하게 다른 관점이다. 에고를 껴안으면 역설적으로 에고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역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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