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꿈 속에서 나는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았다.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렇다면 꿈 속의 나비가 나인가,
  아니면 깨어난 사람이 나인가?"

장자가 나비설화를 통해 제시한 의문이다. 얼핏보면 형이상학적인 질문같은 화두를 던졌다. 



   뇌과학의 답변은 이중적


이에 대한 뇌과학자들의 답변은 이중적이다. 우뇌만 작동하면 나비와 사람의 구분 자체가 안된다, 나와 나비는 물론 삼라만상 전체가 온통 하나로 연결됐다는 점만 인식이 된다. 

반면에 좌뇌가 기능하면 나비는 나비, 나는 나, 서로 엄연히 다른 개체로 인식이 된다. 뇌의 영역에 따라 판단의 잣대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럼 수면이나 사망처럼 뇌가 기능을 제한하거나 작동을 중단하면 어떻게 되는가? 애석하게도 뇌과학은 이 점에 대해서는 답을 줄 수가 없다.



   수련을 통한 자각



수련을 통해 의식적으로 접근하면 이와는 다른 자각에 이르게 된다. 내 몸에 대한 상을 지우고, 살아온 날들의 기억된 상을 지우고, 내 영혼마저 지워버리면 오직 하나만 남는다. 텅텅 빈 허공, 이름하여 '우주'라는 것이다. 내가 바로 우주인 것이다. 인간을 소우주로 표현하는 건 그 비중을 지나치게 축소한 것이다. 하지만 우주라는 컨셉은 너무 거창해 왠지 피부에 잘 와닿지 않는 측면이 있다.

물론 수련과정의 자각도 단계가 있다. 처음엔 이 몸과 마음이 나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나는 나, 너는 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것이다. 그런 다음엔 너와 내가 하나라는 걸 인지한다. 나는 산이고 바다이고 꽃이고 곤충이다. '산은 물이요 물은 산'이다. 그 사이에 구분은 전혀 없다. 그 단계를 넘어서면 내 속에 우주 전체가 들어온다. 나는 우주를 관장하는 창조주가 된다. '산은 졸졸 흐르고 물은 우뚝 선다.' 그리고 다시 나는 나로 돌아온다. 나는 나, 너는 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출발한 그 자리가 바로 도착한 자리가 된다.

의식혁명의 대가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를 이자리에 모신다. 본질적인 문제를 검증하려면 아무래도 네임밸류가 있는 사람이 나서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데이비드 호킨스: 
"처음에는 '나는 몸이다.'라고 동일시한다. 그러나 항복 기제가 계속되면서 '나는 몸을 느끼는 마음이지 몸이 아니다.'라는 사실이 매우 뚜렷해진다. 감정과 신념을 더욱 항복하면서 마침내는 '나는 마음도 아니다. 나는 마음과 감정, 몸을 목격하고 경험하는 그 어떤 것이다.'라고 자각한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는 <놓아버림>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이것을 '내면의 큰 나'라고 불렀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항상 추구하면서도 몰랐던 것이라고 단정한다. 우리는 정신없이 바쁜 삶의 외곽에서 일어나는 현상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잘못을 했다는 것이다. 호킨스 박사는 그런 ' 큰 나'를 자각했지만 '큰 나'는 과연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속세로 돌아왔다고 고백했다.


   속세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그러나 그가 돌아온 속세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별로 없다. 전염병과 기근, 전쟁과 질병, 태풍을 비롯한 온갖 자연재해, 개인의 극심한 불행과 세계적인 재난이 끊이지를 않는다.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심초사했건만 도대체 세상은 왜 이 모양일까? 이 문제에 대해선 신에게 마이크를 넘긴다.

 신: 
"절대계를 제외하고는 대립물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절대계는 너희에게도 내게도 충분치 못했다. 나는 거기에서 언제나 그대로임 속에 존재했으며, 너희가 나온 곳도 거기이다.

절대계 속에는 앎만 있을 뿐, 체험은 없다. 앎은 신성한 상태이지만 가장 위대한 기쁨은 존재 속에 있다. 존재는 오로지 체험한 뒤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것을 순서대로 펼치면 앎, 체험, 존재가 된다. 이것이 바로 '성삼위일체', '삼위일체'인 신이다."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 신은 속세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신음하는 이 속세는 체험을 위해 그렇게 창조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이 절대계 속의 여여함보다 더 위대한 기쁨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승과 피안을 모두 경험했던 사람의 입장은 어떨까?

아니타 무르자니: 
"오, 삶은 원래 그렇게 발버둥쳐야 하는 게 아니었어. 삶이란 즐기면 되는 것, 재미있게 살면 되는 거였어. 이걸 몰랐다니!"

임사체험을 통해 피안을 경험했던 아니타 무르자니의 외침이다. 삶이란 즐기면 되는 것, 그렇게 했을 때 위대한 기쁨도 체험이 된다는 증언이다. 그녀의 증언은 계속 이어진다.

아니타 무르자니: 
"나는 깨달았다. 지금까지 그 지난한 삶 동안에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뿐이었다는 것을. 그것은 바로 내가 결함이 있다는 그 어떤 느낌이나 판단없이 그저 내가 되는 것이었다. 

동시에 우리의 본질은 그 핵심이 순수한 사랑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우리는 순수한 사랑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우리가 전체에서 왔고 또 전체로 돌아가는 존재라면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를 깨닫게 되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사랑이 되는 것과 본연의 자기 모습이 되는 것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믿음이나 신앙 따위는 '앎'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고 고백하면서 그녀가 들려주는 앎의 내용이다. 그럼 저렇게 살다 가면 어떻게 될까? <신과 나눈 이야기>가 그 해답을 제시한다.

신: 
"성신은 아들이 그 자신에 관해 체험한 모든 것의 탈육화인 존재다. 그것은 오직 알고 체험한 것에 대한 기억을 가질 때만 가능한, 소박하면서도 절묘한 있음 is-ness이다. 이 소박한 있음은 더없는 기쁨이다. 그것은 알고 체험한 뒤에 오는 신의 상태이며, 신이 태초에 갈망했던 상태이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그냥 나다. 지금 이 순간에 있으며 지금 이대로 충분한 존재다. 돌고 돌아 제자리, 더 이상의 답변은 별로 의미가 없다. 그리고 내 역할은 스스로를 조건없이 사랑하고 두려움 없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아니타의 증언처럼 내가 행복하면 온 우주가 행복하다. 그녀의 설명처럼 우리의 삶은 이 우주에 주는 우리의 선물이다.

#나는누구 #신나이 #아니타무르자니 #데이비드호킨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블로그스팟 첫 개설(25.8.8.금)

불운 잠재우기

마음 영역에서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