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두려움을 원천적으로 놓아버린 임사체험 경험자 아니타 무르자니의 사례는 심층적으로 분석할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일상에서 그렇게 겁이 많았던 그녀가 어떻게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믿음은 앎 앞에서는 무용지물
그녀를 이곳에 초청해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에서 밝혔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핵심적인 방법에 대해 청문회 형식으로 그녀의 증언을 청취합니다.
"믿음이나 신앙 따위는 '앎'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어요. 그건 내가 모든 것이 되는 것과 비슷했어요. 내가 모든 것 안에 존재했고, 모든 것이 내 안에 존재했지요. 나는 영원하고 무한해졌어요.
나는 이 명징함 속으로 깨어났고, 그래서 그냥 이해하게 되었어요. 만일 내가 돌아가기로 선택한다면 몸이 나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죠."
앎이 믿음이나 신앙을 훨씬 초월한다는 설명은 일반적인 인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도대체 공포의 진원지, 즉 죽음의 체험을 통해 그녀가 알게 된 것이 무엇이길래 '앎'을 저토록 중시하는 것일까요?
"내가 죽었을 때 나는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어요. 내가 어떤 장소로 간 것 같은 기분이 아니라요.
눈을 번쩍 뜨고 깨어나서 모든 지각이 깨어난 그런 존재가 된 기분이었어요. 360도로 시야가 다 확보되고, 완전한 공간감이 생겼지요.. 나는 나에 관련된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알 수 있었어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살고 있었지요..
아마 이걸 장님이 처음으로 눈을 떠 세상을 보게 된 것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 장님이 어디 다른 데를 간 것도 아닌데 세상의 참모습을 두 눈으로 명료하게 보게 되었다면 얼마나 놀라겠어요!"
죽음은 없다?
세상에, 이건 죽음이 없다는 얘기 아닌가요? 우리가 너나없이 두려워하는 죽음을 겪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멋진 삶이 전개된다는 진술입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무지에서 비롯된 우스꽝스러운 코메디가 됩니다.
증언의 내용이 워낙 파격적이니 다른 증인을 더 불러 검증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죽음 이후에 대해 진술할 수 있는 증인은 아무래도 <신과 나눈 이야기>의 신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죽음이 닥치면 몸과 마음이 떨어져나간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떨어져나가지 않는다. 몸은 가장 밀도가 높은 부분을 뒤로 남겨둔 채 형태를 바꾸긴 하지만 그 외피는 항상 유지한다. 마음 역시 세 가지 차원, 혹은 세 가지 측면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에너지 덩어리로 영혼 및 몸과 결합하여 너희를 따라간다.
만일 너희가 다시 지상의 삶이라는 이 체험을 선택해야 한다면, 너희의 신성한 자아는 다시 한번 자신의 진짜 차원들을 소위 몸, 마음, 영혼으로 분리시킬 것이다. 사실 너희는 세가지 다른 특성을 지니긴 했지만, 같은 하나의 에너지이다."
죽음 이후에도 생명현상이 지속된다는 점에 대해선 두 존재의 증언이 일치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왠지 2퍼센트가 부족한 느낌이 듭다. 기존 종교의 설명과 뚜렷한 차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사후 심판은 있는가 없는가
그럼 진도를 조금 더 나가 죄와 벌, 즉 우리가 내심 두려워하는 사후의 심판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도 알아봅시다. 이번엔 두 존재의 증언을 연속으로 듣는 형식입니다.
아니타(증인1) 증언
"저 세상에는 판결 같은 게 단연코 없습니다. 판결할 게 없으니까요. 우리는 모두가 순수의식이에요.
많은 이들이 사후에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잘못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한 것 같아요.
그러나 처벌이나 보상, 판단, 판결 따위는 '저기'의 것이 아니라 '여기'의 것이에요... 연쇄살인범은 병이 든 사람이에요. 암에 걸린 사람처럼요.
현재 우리 사회에 살인자가 더 많아졌다면 그건 그만큼 우리 사회가 병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을 가둬두면 일시적으로 살인은 줄겠지요. 그건 마치 암의 증상만 치료하는 것과 같아요. 하지만 사회의 핵심 문제를 변형하고 초월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더욱 커질 뿐입니다."
신(증인2) 증언
"너희가 내세라 부르는 곳에는 어떤 심판도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너희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너희가 현세에서 자신에 대해 얼마나 엄하고 가혹하게 구는가를 생각하면, 거기서도 너희는 자신에게 낮은 점수를 줄 게 분명하니까)...
아니다, 거기에는 계산서도 없고 엄지를 올리거나 내리는 사람도 없다. 심판하기 좋아하는 것은 인간들 뿐이다. 너희가 그러하기 때문에 너희는 나도 그러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것은 너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위대한 진실이다."
사후에도 생명이 계속 이어지고, 심판도 없다면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들 각자가 그녀처럼 임사체험을 통해 그것을 증득하기 전에는 진심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측면도 분명히 있습니다. 체험을 마친 그녀에겐 '앎'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우리들에겐 '앎'이 아니라 신앙 혹은 신념과 비슷하게 작용할 여지가 많습니다.
증언의 진위 여부 감별하기
그렇다면 희귀한 임사체험을 거치지 않고서도 저 증언의 진위 여부를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다행스럽게도 세상엔 이미 그런 방법들이 나와 있습니다.
1. 우선 전통적인 방법은 강도높은 수련을 통해 그것을 직접 증득하는 것입니다.
수련의 정도가 일정 궤도에 이르면 생사일여, 즉 삶과 죽음은 하나라는 걸 깨치게 됩니다. 더 본질적으로 설명하면 삶도 죽음도 허상일 뿐, 존재하는 건 여여한 본성 하나 뿐입니다. 그건 태어나지 않았고 죽지도 않으며,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안과 밖도 없습니다.
그래서 생사일여를 진심으로 증득한 사람은 모든 것이 변할 수밖에 없다.
신심명으로 유명한 중국의 고승 승찬은 그런 깨침을 통해 불치의 병인 문둥병에서 회복되었습니다. 또 우리 사는 세상에서도 그런 증득을 통해 의료진이 포기한 난치병에서 벗어난 사례들이 적지 않습니다. 임사체험 못지 않은 기적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고달픈 수련을 통해 힘겨운 버림의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말처럼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방법입니다.
2. 반면에 21세기형 수련법은 쉽고 간결하면서도 효과는 전통적인 수련에 뒤지지 않아 일반인도 독학이 가능합니다.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호오포노포노'를 하면 의식은 빠른 속도로 성장합니다. 그런 기초 위에서 '놓아버림'을 실천하면 현실적인 변화를 직접 증득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빅 마인드'를 활용하면 관점의 변화가 더욱 파격적으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아니타처럼 직접 임사체험을 하지 않더라도 '앎'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수련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서 가는 방식이라면 21세기형 수련법은 비행기를 타고 신속하게 이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자아의 틀이 너무 강한 사람에겐 이런 방법이 잘 먹히지 않는 단점도 있습니다. 방법이 너무 심플하고 너무 젠틀하다보니 그런 부작용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죽고 버리기'처럼 강도높은 수련을 통해 에고의 위력을 먼저 순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전체의식이 어떤 것인지를 자각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현대적인 수련법을 수용할 수 있게 됩니다.
다만 이런 설명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지도에 불과하다. 지도에 나타난 지점, 예컨데 동해 먼바다에 있는 보물섬에 도착해 숨겨진 보물을 찾으려면 그 지도를 가이드로 삼아 각자가 직접 항해를 해야만 한다. 그것은 아무도 대신 해줄 수 없는, 저마다의 고유한 인생숙제이기 때문이다.
#앎의중요성 #믿음무용지물 #사후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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